겨울은 춥고 건조하다. 구글에 겨울을 검색하여도 뜨는 이미지가 대부분 하얗거나 얼어붙은 푸른 물의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미지가 통용되지 않는 날이 겨울에 있었다. 세상이 온통 화려하게 반짝이고 초록색 나뭇잎 위로 금색과 붉은색을 얹어 치장하는 날,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 하면 당연히 떠오르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산타클로스. 전 세계 어린이들의 크리스마스 날 밤 선물을 주고 다닌다는 할아버지. 사실 세나 이즈미는 산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크리스마스 소원 빌기 따위는 옛 저녁에 졸업한 참이었지만, 원래 사랑에 빠진 이는 평소 자신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일을 하곤 한다. 예를 들면 왕님이 제 연인과 함께 어디서 주워와 치렁치렁 꾸민 나무에 대고 짝사랑 중인 그 아이와 크리스마스에 만나면 좋겠네, 속삭이는 정도.
그러니 크리스마스이브 날, 나이츠 knights 멤버들의 선물을 사기 위해 시내를 돌아다니던 중 시라이시 아스미와 맞닥뜨린 것은 산타의 선물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아스미?”
“앗, 세나 선배!”
빵빵한 패딩 위에 목도리를 둘둘 감고 쇼핑백을 가득 든 아스미가 세나를 발견하고 분홍빛 눈동자가 한껏 반달 모양으로 접히도록 웃었다. 턱이 덮이도록 감긴 두꺼운 목도리에 목소리가 뭉개져 어쩐지 먹먹하게 들렸다. 꼭 눈사람 같은 모양새에 옅게 미소를 지은 이즈미가 잰 걸음으로 아스미에게 다가가 쇼핑백을 빼앗아 들었다. 뭘 얼마나 산 건지 가방의 무게가 제법 묵직했다.
“뭘 이렇게 많이 샀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고 있어요! 선배는요?”
“뭐, 나도.”
제가 산 것과 구별되게 아스미의 것을 나누어 든 이즈미가 아스미와 보폭을 맞췄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아스미는 금방 제 손에 들린 게 전부 이즈미에게로 넘어간 것을 알고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사실 세나 이즈미가 그런 게 통할 위인은 아니지 않나. 이즈미는 코웃음도 치지 않고 제 손에 들린 가방끈을 더 단단히 쥐었다.
“제 건 제가 들 수 있어요.”
“그래, 그래.”
“아이돌은 무거운 것을 들면 안 돼요.”
“하? 지금 설마 선배한테 대드는 거?”
잠시간의 실랑이 끝에 이긴 것은 세나 이즈미였다. 하긴, 말이 잘 통하지 않기로 유명한 이들 중 하나인 츠키나가 레오를 구슬리는 데에는 도가 튼 사람을 아스미 같은 애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즈미가 아스미의 시선에 맞춰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더 살 거 남았어?”
“음…, 세나 선배 것만 사면 돼요.”
“그럼 내가 있으면 안 되겠네.”
“그…, 렇죠?”
말과는 달리 전혀 떠날 기색을 보이지 않는 이즈미를 슬쩍 올려다본 아스미가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가는 것보다는 옆에 있어 주는 것이 아스미에게도 편하고 좋긴 했다. 굳이 함께 다니는 것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친근하고 상냥한, 좋아하는 선배와 함께 다니는 것이 이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더 좋은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전 세나 선배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좋고 편하니까, 앗, 이거 다른 선배들에게 비밀인 거 알죠?”
“당연히.”
평소처럼 태연한 무표정이었으나 사실 살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는 이즈미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웃음을 참기 위해 쇼핑백 손잡이를 꽉 쥐어 조금 이따 손을 펴보면 손톱자국이 있지는 않을지가 문제였다. 이즈미가 제 손바닥을 위해 괜히 가 방을 고쳐 잡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벌린 입 사이로 흰 입김이 은색 머리카락을 적시며 올라갔다.
“아무튼 세나 선배가 제일 편하니까, 당연히 선배 선물을 제일 먼저 사려고 했거든요. 그런 데 막상 보니까 다 마음에 안 들어서 아직도 못 사고 있었어요.”
“그것도 나랑 같네.”
좋아하는 이에게는 원래 가장 좋은 것만 골라서 주고 싶은 법이다. 이즈미가 결국 눈을 휘어 웃으며 아스미를 내려다봤다. 듣기 좋은 말만 쏙쏙 골라서 한 아스미는 막상 그 표정을 보지도 못하고 씩씩하게 앞만 보며 걸어가고 있었지만, 차라리 그게 이즈미에게 다행이었다. 감정은 숨길 수도 없다더니 순간적으로 새어 나온 감정은 누구보다 노골적인 애정을 띄고 있었다. 아스미가 눈치가 없는 게 다행…, 이라고 해야 할지. 매번 상충되는 고민을 하게 되지만 이번만큼은 다행이었다. 이런 것으로 제 짝사랑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목소리에 함빡 담긴 애정을 급히 갈무리한 이즈미가 얼굴을 가다듬었다.
“선배도 제 것만 남으셨어요?”
“응, … 뭘 좋아할지 모르겠어서. 같이 살까?”
모를 리가 있나. 세나 이즈미는 무척이나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시라이시 아스미의 호불호 같은 것을 잊을 리가 없었다. 다만 솔직하게 말하면, 방금 겨우 만났는데 이대로 헤어 지기는 아쉬운 탓이었다.
이즈미의 말을 들은 아스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즈미를 빤히 바라봤다. 명백한 고민이 작고 귀여운 얼굴에 새겨져 있었다. 잠시 이즈미의 푸른 눈을 또렷이 응시하며 고개를 슬쩍 기울인 아스미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는 듯이 경쾌히 말했다.
“그럼, 그럴까요?”
사실 당사자가 곁에 있는 한 선물 고르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야 했지만 예상외로 선물을 고르는 데에는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었다. 이즈미가 아스미의 선물로 눈여겨 둔 것들은 아스미가 보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대였기 때문이다. 이즈미가 집어 들면, 아스미가 말렸다. 종국에는 아스미가 먼저 이즈미의 선물로 고른 것과 비슷한 가격대로 사기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아스미가 무얼 사주던 좋아 가격대가 높지 않은, 물론 이즈미 기준이기는 했다마는, 로션으로 선물이 결정된 이즈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둘이 가게에 들어설 즈음부터 내리기 시작하던 눈은 선물을 다 고를 때가 되자 제법 두껍게 쌓여 있었다. 그치지 않고 펑펑 내리는 눈 뒤로 깔린 하늘의 분홍색이 선명했다. 발밑으로 뽀득 거리는 소리를 내며 밟히는 눈이 시야가 찬란해질 만큼 흰빛을 반사했다. 기분이 좋은지 가게를 나온 아스미가 명랑하게 웃는 소리를 내었다. 꺄르륵, 웃는 소리가 가라앉은 찬 공기를 타고 잘게 진동하며 떨어졌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네요!”
이런 가게가 모인 시내는 대부분 중앙에 광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광장은 이런 이벤트가 있을 때면 그 행사에 맞게 꾸미는 법이다. 운이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즈미와 아스미가 마지막으로 갔던 가게 근처에는 광장이 있었다. 단단한 대리석을 꽃 모양으로 바닥에 깔고 돌로 만든 중세풍 가로등을 온통 작은 전구로 꾸민 광장 한가운데에는 얼어붙은 분수 대신 어지간한 가게들의 지붕보다 높게 솟은 전나무가 존재했다. 전구와 반짝이는 구체와 인형을 주렁주렁 달고 머리를 한껏 젖혀야 노란빛을 발하는 별이 보이는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따뜻하고 달곰한 음료를 손에 쥐고 발이 닿는 대로 걷던 둘이 광장에 닿은 것은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었을 즈음이었다. 흰 얼음은 주황으로 물든 하늘에 닿아 연한 붉은색을 품고 꼭 벚꽃잎처럼 내렸다. 아스미가 트리를 뒤로하고 빙글 돌아 웃었다. 떨어진 벚꽃잎이 음료 잔을 쥐어 평균보다 더 오른 온도에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답답해서 풀어낸 목도리 끄트머리가 함께 돌며 자취를 남겼다. 가지런히 정리한 갈색 머리카락이 눈과 바람을 타고 날았다. 봄의 분홍빛을 담은 눈이 휘어지며 반달 모양을 드러냈다. 입술이 벌어지고, 흰 입김이 솟아오르며 단순한 단어의 나열을 읊는다.
“메리 크리스마스, 세나 선배.”
올해만 해도 수없이 들은 흔한 문장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세나. 이즈미. 세나 이즈미. 선배. 세나 선배. 이 여러 가지 호칭들로, 팬에게서 들은 것까지 합친다면 정말 셀 수 없이 많이 들은 문장인데도 어쩐지 생경히 느껴지는 것은 말한 이가 시라이시 아스미라 그런 것인지. 이즈미가 아스미를 따라 푸른 눈을 휘었다. 입안에서 혀와 점막이 마찰하며 소리가 울린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스미.”
이즈미는 온통 하얗고 푸르렀다. 사람은 정반대의 이에게 끌린다더니 온통 하얗고 푸르러 겨울을 닮은 이즈미는 결국 그 자체로 봄과 같은 아스미에게 이끌렸다. 꼭, 뜨거운 손과 맞닿아 눈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눈은 봄이 오면 녹아내린다. 그건 명백히 하나로 정해진, 세계의 변하지 않을 규칙이자 운명과 같았다.
세나 이즈미는 시라이시 아스미를 사랑했다. 그것이 바로 다른 이들을 제외한 이즈미에게만 오직 유일하게 적용하는 세계의 운명이었다.
마라님(@c0mm1ss10nwr1te) 커미션